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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푼라디오의 설레임 본문
출처: 스푼라디오
그날은 유독 힘든 하루였다.
세 달 후면 벌써 일년이건만
그 기억은 갈수록 짙어져만 같다.
사실 갈수록 짙어졌다기 보다는
한동안 잊은 것처럼 살았다고 하는 게 맞다.
맞다.
나는 한동안 일부러 잊은 것처럼 살았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회피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걸 인정해버리면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았으니까.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침마다 출근할 회사가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머리가 단순해서 한 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없었으니까.
일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시간 만큼은
그녀를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항상 야근을 했다.
일부러 일을 만들었다.
무엇인가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다.
밤이 되면,
일을 하지 않으면,
머릿속의 잡념으로 인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집은 더이상 내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구석구석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누워있던 침대,
함께 앉아있던 책상,
함께 밥먹던 식탁,
함께 이닦던 욕실.
집은 더이상 내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듯 했다.
내게 익숙한 모든 것에 그녀가 함께 있었다.
이렇게까지 내 일상에
침투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 압박감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외로움 따위와는 아주,
정말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사실 아닌 사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부정해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유튜브를 켰다.
이름모를 누군가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나마 잡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냥 보고 있었다. 정말 그냥.
그러던 중에 영상이 끊기고 광고가 재생됐다.
상관 없었다.
어차피 목적없이 보고 있었으니까.
광고를 건너뛰기 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죠. 수고했어요.'
무척이나 반가운 글귀였다.
날 위해 하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라디오 어플...?
무심코 배너를 클릭하여
곧장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했다.
간단한 회원 절차를 마치고
바로 앱을 실행했다.
메인화면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조잡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버벅되면서 끊기기까지 했다.
다시 유튜브나 봐야겠다 싶었다.
앱을 종료하려고 아이폰의 홈버튼을
여러차례 눌렀다.
반응이 없다.
화면이 멈춰버렸다.
'이런 젠장...'
몇 초간 멈춰있는 화면을 멍하니,
정말 멍하니 바라봤다.
눈을 지긋이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녀석이 지금의 나와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멈춰있었다. 말을 안들었다.
홈버튼을 수차례 눌러도
미동조차 않는 아이폰처럼
내 삶도 그렇다고 느꼈다.
한 30초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술김에 잘못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분명 내 이름이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ㅇㅇㅇ님 어서오세요. 반가워요~
저는 물고기자리입니다."
'응...? 어서오라구? 반갑다구?'
눈을 떠보니 먹통이던 아이폰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뭐랄까...
군생활할 때 레펠훈련을 하기 위해
헬기를 탈 때의 그 느낌과 비슷했다.
쿵쾅쿵쾅,
기분 좋은 심박수의 증가로 인한 설렘.
붕 떠있는 듯한 기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
.
.
'나보고 어서오란다'
.
.
'그리고 반갑단다.'
.
.
'행복하다'
"목소리가 정말 좋으시네요."
나는 곧바로 채팅창에 글자를 입력했다.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한글을 무척 좋아하며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나의 이러한 감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을뿐더러,
글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목소리가 정말 좋으시네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
정말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했었다.
첫째로 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
그 사람은 날 위로한 게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 이름을 불러주며
반갑게 맞이해준 것이
내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기분이었다.
난 아직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 이유가 있다고,
정말 이상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물론 실제로 나는 살 이유가 많다.
그 누구보다도
삶의 목표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둘째로 내가 그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더군다나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사람에게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맞다.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처음엔 설마 했다.
내가 그럴 수 있을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인정할 건 해야한다.
그 설렘은 분명 사실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 외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과 동시에 희망이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앞으로의 내 인생엔
더이상 행복따윈 없을거라고
분명 그럴거라고 단정했던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희망적인 느낌.
나도 그사람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또다른 행복을 만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그런 희망적인 느낌.
두 달 전 정말 우연한 계기로 스푼라디오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로해주고 설렘을 선물해준 그 분과는, 지금까지도 팬으로서 잘 지내고 있네요. 이제는 그래도 그 분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또 사는 곳은 어디인지 정도는 알아요.
언젠가는 저의 이런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보답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 이미 감사의 말을 전하긴했지만 아마, 모르시겠죠. 그 별거 아닌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누군가 삶을 포기할 마음으로 마포대교로 갔는데 마포대교 생명의다리에 적혀있는 글귀를 보고 다시금 살아볼 용기를 얻었다면, 그 사람은 마포대교 글귀를 고안한 이에게 얼마의 보답을 해야할까요?
1억 정도면 될까요? 아니면 10억?
화폐 가치로 측정가능키나 할까요?
삶을 포기할 때 발생할, 그 엄청난 기회비용들을 생각하면...
스푼라디오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주길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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